Part 1 꿈꾸는꼬목사 이야기/사랑하는 가족

아들과 졸업여행(2/21-23) @Japan

꿈꾸는꼬목사 2023. 2. 24. 07:26
마지막 여행을 일본으로 택한 이유


아들과 고등학교 졸업여행을 다녀왔다.
아마도 단 둘이 가는 마지막 여행이 아닐까 싶다.
중학교 때는 코로나로 못 갔고,
마지막 졸업여행으로 일본을 택했다.

좋은 곳은 친구들이랑 가면 되니까
아빠와는 잘 가지 않는 곳으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으로....
그래서 택한 히로시마와 시모노세키.

첫째날

 


화요일 새벽에 아들과 함께 인천공항!
그리고 라운지에서 식사하고 일본으로..

후쿠오카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든지...
입국 수속만 거의 1시긴 30분 걸린 듯...


후쿠오카로 들어가서는 one day pass로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그리고 하카타 역에서 야마구치 히로시마 패스를
실물카드로 구매하려고 1시간 넘게 달렸다.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이어서... 후쿠오카는 대부분 온천으로 오지만
우리의 목적은 아니어서 대략 생략했다.

둘째날


후쿠오카에서 하루자고,
새벽에 히로시마로 향했다.
이것은 야마구치 히로시마 5일권으로
충분히 사용했다.


15년만에 방문하는 히로시마는 낯설기도 하고,
친숙하기도 하다.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감성이고....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히로시마 원폭돔.
계속 학생들은 와서 자원봉사자의 설명을 듣고,
계속 그 내용을 적었다.

그리고 그 구석에 초라하게 있는
조선사람들의 추모비!


그리고 밤에 산책을 하먀 바라본 히로시마성

 

셋째날


히로시마의 새벽은 한산했다.

레일패스로 시모노세키를 예약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 곳을 가려면 고쿠라에서 내려
지방열차를 타고 가야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요금이 별도...

 


시모노세키에 내려서
가까운 곳에 있는 아침식사를 하러 갔는데
아주 오래된 타코야끼집
할머니가 하시는 허름한 식당...


그 곳을 거쳐서
청일강화기념관으로 향했다.
이걸 기점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주도권이 청에서 일본으로 향했지..

 


청일전쟁 뒷처리 위한 회담… 제1조 ‘청으로부터 조선 독립’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서 일본의 속국이 됐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평생 이 문제로 고민할 것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된 가장 직접적인 배경 중 하나가 시모노세키조약이다. 

이 조약은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 직후 청·일 두 나라 간 맺은 강화조약으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청의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만나 배상 문제 등을 논의한 회담을 말한다. 

이토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당한 자로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그는 강압적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을 장악한 인물이기도 하다.

시모노세키조약은 ‘하관조약’(下關條約), ‘마관조약’(馬關條約)이라고도 부른다.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은 왜 일어났나. 청·일 양국은 조선을 두고 서로 힘겨루기를 했다. 일본은 유신 직후 조선과 수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부산·인천·원산을 개항시켰다. 1882년 차별 받던 구식 군대의 봉기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고종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군은 난을 진압한 뒤에도 철군하지 않고 조선에 남았다. 2년 뒤인 1884년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청군에 의해 진압됐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청군은 조선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천진조약(1885년)을 체결해 조선에서 두 나라 군대 철수, 조선에 출병할 때는 상호 통고 등의 약속을 했다. 하지만 청은 여전히 조선의 내치·외교에 간섭을 하는 등 조선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던 차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했다. 청이 조선의 요청에 군대를 보내자 일본도 천진조약을 들먹이며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이후에도 일본은 철병을 거부했고 조선의 요청을 받은 것처럼 위장해 아산만에 주둔 중인 청군을 공격했다. 아산만 앞바다 풍도에서 청의 함정이 일본군의 습격으로 침몰해 청군 1200여명이 익사하자 싸움이 전면전으로 번졌다. 일본은 해전을 비롯 평양전투 등에서 이기면서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결과 동양의 패권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고 이후 일본은 조선 등 대륙으로의 침약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됐다. 이 전쟁 직후 미국의 중립으로 청·일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 바로 시모노세키조약이다.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부두에 ‘춘범루’(春帆樓)가 있다. 바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은 장소이다. 춘범루 입구에는 전쟁과 협상을 주도한 이토의 흉상이 서 있다.

이 조약이 중요한 이유는 제1조 때문이다.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예를 들면 조선이 청에 납부하는 공헌, 전례 등은 이 이후에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한다.’ 

바로 이 조항으로 청은 조선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행세할 수 없게 됐고 일본이 조선에 파병해도 항의할 수 없게 됐다. 조선은 이 조항의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조항의 글자만 보고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됐다’며 반겼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완용이 쓴 현판을 내걸은 독립문도 세웠을 정도다. 

이 조항의 진실은 일본이 조선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일본은 이 조약에 의해 대만에 대한 주권을 이양 받아 북쪽으로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조선의 강제 합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 전쟁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시모노세키조약은 총 6조로 돼 있다. 청이 관리하고 있는 지방(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제도 등)을 일본에 양도하고 군비 배상금으로 순은 2억 냥을 일본 제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했다.  

◇시모노세키조약 에피소드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를 회담 장소로 선택한 것은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회담장에서 내려다보이는 간몬해협을 통과하는 일본 군함의 위용을 청국 사절단에게 보여줌으로써 회담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에서다. 

회담장 옆에는 ‘이홍장도(道)’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이홍장이 회담을 마치고 숙소인 사찰로 돌아가던 중 한 청년이 쏜 총에 맞았다. 총알이 눈 밑에 명중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부상을 입은 이홍장은 보름 정도 요양을 하고 다시 회담에 임했다. 이홍장은 사건 재발의 두려움 때문에 넓은 길을 피해 오솔길을 통해 숙소와 회담장을 오갔다. 그 길 이름이 이홍장도이다.

회담 장소였던 춘범루는 일본 최초의 복어요리전문점이자 요정 겸 여관이었다.  시모노세키는 복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도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16만명의 병력을 시모노세키에 집결시켰다. 그런데 군사들이 복어요리를 먹다 복어 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속출했다. 이를 본 도요토미는 “그렇게 빨리 죽고 싶으면 조선에 건너가서 싸우다 죽으라”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시모노세키의 복어 요리는 역사가 깊다.

출처 : https://www.100ssd.co.kr/news/articleView.html?idxno=87109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산통신사가 착륙한 곳

 

◇일본 본토 첫 착륙지 '시모노세키'= 당시 범선으로 대한해협을 건너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고된 일이다. 때문에 일본 본토 땅을 밟았을 때의 안도감은 남달랐을 것이다. 혼슈 서쪽 끝에 위치한 야마구치현의 항구도시인 시모노세키. 이곳이 바로 조선통신사들의 본토 첫 착륙지였다. 

후쿠오카와 시모노세키를 잇는 다리인 '간몬교' /사진=이송이 기자
일본인들은 통신사가 도착하기 직전 '아카마신궁' 맞은편 항구에 방파제와 다리를 새로 짓는 등 분주했다. 잠잘 곳을 위해 숙소도 짓고 융숭한 식사대접을 준비하기도 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조선통신사상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앞에 서면 시모노세키와 후쿠오카를 잇는 '간몬교'가 펼쳐진다.
조선통신사들의 필수 관문이었던 '아카마신궁'은 안토쿠 일왕을 모신 곳이다. 안토쿠 왕은 평안시대에서 막부시대로 넘어가던 소용돌이 속에 8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 인물이다. 일본식 용궁 양식인 ‘아카마신궁’은 붉은빛 건물과 본궁 아래 연못이 특징이다.
이곳에는 조선통신사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문화재가 소장돼 있다. 바로 1711년 8번째 통신사 부사였던 임수간의 친필 시이다. 석양을 바라보며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일왕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아카마신궁'의 명예궁사 미즈노 나오후사는 "조선에서 가져온 종이, 붓, 벼루 등으로 쓴 작품이라 더 뜻깊다"고 전했다.

출처: https://v.daum.net/v/20151219114856947

 



그리고 아들과 마지막 비행기에서 한 컷 !

 

전체마무리


아들과 떠나는 단 둘의 마지막 여행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졸업 때 떠난 제주도 자전거 일주.
3일간 정말 고생 많이 했는데...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과 떠나는
일본 역사여행.
이번에는 3일간 거의 75,000-80,000보를 걸었다.
자전거 여행만큼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면서 아들에게 이야기 해줬다.
“이제 네 아들에게 해 주렴”